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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 은평한옥마을
📃 연구제목 은평한옥마을 지역의 역사 탐구 및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게시글 작성
✒ 융합탐구팀 김정민 박건후 박세환 윤혜원 정찬훈 함인태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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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소개말
CC BY-SA 4.0 | 저작자: Mobius6 | 링크
은평 한옥마을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2010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주민들의 보금자리입니다. 이와 더불어 북한산 한 문화체험 특구로 지정된 후 한옥 스테이, 문화 체험 등을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관광 명소로서의 역할 또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존속 기간이 길지 않지만 은평 한옥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은평구 진관동 부지는 오랜 역사를 가지며, 전통적인 한옥의 입지 조건 또한 만족합니다.
HISTORY - I
역사적 배경 — 은평구
삼국시대
은평은 한강 하류 지역에 위치해 있어 농사와 무역에 용이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은평을 놓고 자주 다투었으며, 실제로 은평은 삼국시대 때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이렇게 은평을 놓고 일어난 전투가 빈번히 발생하다보니 은평을 소유하던 국가도 자주 바뀌게 됩니다. 백제가 은평을 차지했을 때는 위례성 지역에 속해있었으며, 신라가 소유했을 때는 신주 지역에, 통일신라 때는 한산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후 경덕왕 16년에는 은평을 한주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고려시대
은평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양주라고 불리게 됩니다. 문종 21년에는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 동경과 더불어 3소경이라고 칭했다가 충렬왕 34년에 한양부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중농정책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을 농경지로 개간했고, 농산물 생산력이 증가했습니다. 또, 한강 수로에 위치해 있어서 수도인 개경으로 농산물을 운송하는 주요 길목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때는 행정 제도를 5부 52방으로 개편함에 따라 은평은 연은방과 상평방으로 나뉘었습니다. 참고로 은평이란 지명은 연은방의 은과 상평방의 평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서대문에서 십 리가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도성 밖 십 리 안쪽으로 묘를 만들 수 없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현 은평 한옥마을 부근은 공동묘지 장소로 매우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한옥마을 부근이 하나의 큰 공동묘지라 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앞쪽으로는 진관내천이 흐르고, 산에 둘러싸여 있어 큰 관점에서 보면 배산임수의 행세를 이루는 점 때문에 무덤 선호지로 인기가 아주 높았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현재 은평역사 한옥박물관에 있는 비석과 발굴 유물들은 은평뉴타운 개발을 할 때 발견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 국권침탈 이후 5부 35방 8면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1913년 각 도의 위치 및 관할지역과 부, 군의 명칭이 결정되면서 연은방과 상평방 지역에 은평면(36개 동, 리 관할)을 설치했습니다. 은평면은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8월 다시 서울시로 편입되었습니다.
산업화 시기
1973년 7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외리가 서울시 서대문구로 편입됨으로써 현재 은평구 지역의 모습이 갖춰졌습니다. 1979년 서대문구에서 분리되면서 은평구(15개동)로 거듭났으며, 이후 여러 번의 행정구역 통폐합 절차를 거쳐 2008년 6월 법정동 11개 동, 행정동 16개 동으로 확정되어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편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이 지역에 택지조성사업이 시행됨으로써 농지형태에서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1969~1978년에는 한양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이 대규모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지금 — 은평뉴타운 개발
은평뉴타운은 2002년에 성북구 길음동, 성동구 왕십리동과 함께 강북 지역 뉴타운 시범지구로 선정되었습니다. 은평뉴타운은 ‘리조트형 생태 전원도시’, ‘더불어 사는 미래형 커뮤니티 조성’, ‘주거 수준의 질적 제고’라는 목표 하에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생태 친화형 도시를 표방하였습니다.
한편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사업 개발을 위해 은평뉴타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말산의 남향 능선 사면부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통일신라 석실분 1기와 조선시대 분묘 3466기, 수혈 주거지 3기와 추정 건물지 2기, 석축 2기, 가마 1기 등 모두 3487기의 유구가 발굴되었습니다. 도자기 등 4979점의 유물도 출토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북한산에서 서북으로 뻗은 2개의 가지 능선 사이의 사면부에서는 조선시대 공동묘지로 보이는 분묘 493기가 확인되었습니다. 은평뉴타운 제3지구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분묘와 함께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의 건물터 6동, 담장시설과 우물, 기와가마,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전기의 가마터 등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은평뉴타운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 결과 총 5000기에 달하는 조선시대 및 근대시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출토 유물도 분청사기 어문매병, 백자 명기, 조선통보 동전, 거울, 유리제 구슬, 귀걸이 등 8000여 점이 나와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의 화엄10산 12사에 나오는 화엄 명찰 청담사의 이름이 적힌 기와와 건물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이 지역이 고대로부터 서울 지역 불교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개발 시 출토된 유물들을 은평 한옥 마을에 위치한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전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은평뉴타운 지구의 녹지율은 42%로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지역의 36%보다 높고, 아파트의 최고층이 15층으로 용적률이 140%로 낮은 편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자랑합니다. 한편 2011년에는 은평뉴타운 내에 한옥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 확정되고 2021년 9월에는 분양이 시작되었습니다. 은평한옥마을은 은평뉴타운 3-2지구 총 6만 5500m2 규모의 단독주택 부지에 156필지가 조성되었습니다. 또 한옥과 관련된 문화콘텐츠를 보존, 전시, 체험할 수 있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201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참고한 자료
- <고려사> 권5, 세가5, 현종 18년 6월 14일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총서.
- 김광식, 한상길, <진관사>,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18, 12~21쪽
- <동문선> 권78, 기, 진관사수륙사조성기
-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3월 3일(계축)
- 서울역사박물관, <은평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2009
-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 2017, 401~408쪽
HISTORY - II
역사적 배경 — 진관동
네이버 지도 캡쳐 | 링크
진관동은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속한 동입니다. 은평구 북쪽 끝에 있으며, 동의 많은 면적이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서쪽과 북쪽으로 경기도 고양시, 동쪽으로 종로구, 남쪽으로 갈현, 불광동과 접해있습니다.
공공누리 (출처표시) | 저작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광섭 | 링크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에 속해있었고, 1906년부터 고양군에 속해있었다가 1973년 7월에 서울로 편입되면서 이름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진관동이 되었습니다. 이후 1975년에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으로 나뉘었으며, 1979년에 은평구 관할로 바뀌었고, 2007년 8월에 다시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이 합쳐지면서 오늘날의 진관동이 되었습니다.
진관동의 이야기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제 8대 왕인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대량원군으로 있을 때 그는 당시 왕이었던 목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았는데 당시 주지였던 진관대사가 어린 대량원군을 자객으로부터 보호하고, 돌보았습니다. 훗날 현종이 왕위에 올라 자신을 돌봐주었던 진관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진관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관사에서 동의 이름이 유래가 되어 진관동이 되었습니다.
참고한 자료
- https://www.ep.go.kr/www/contents.do?key=841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43461
GEOGRAPHY
지리적 요건
전통적으로 마을이 자리잡는 데에는 풍수지리적 조건이 중시되어 왔습니다. 풍수지리에서 자연의 생명력이 모이는 곳, 즉 명당은 보편적으로 마을의 뒤쪽에 산이 위치하고 앞쪽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의미합니다. 또한, 마을은 경사, 즉 높낮이가 있는 지형을 선호하였는데 이는 씨족 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모습과 연관이 있습니다. 해당 지역에 맨 처음 들어서는 집, 즉 종가는 모든 집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가장 높은 땅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들어선 집들로 인해 마을이 조성되며 유기성을 갖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은평 한옥마을은 비록 전통적인 절차는 완벽히 따르지 못했지만, 마을이 들어서는 이상적인 지형적 조건과 유사합니다. 우선 은평 한옥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부지는 예로부터 ‘명당’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고려 현종 재위 당시 거란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불심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현종은 명당을 찾아 절을 세우고자 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적합한 자리가 바로 진관사가 위치한 은평 한옥마을 부지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은평 한옥마을의 앞쪽에는 진관내천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한산이 위치하고 있기에 배산임수의 조건 또한 만족됩니다. 또한, 정해진 부지에 한 번에 개발되었기에 마을의 집들이 종가부터 순차적으로 들어서지 못했지만, 북한산과 가까운 마을의 뒤쪽부터 앞쪽에 이르기까지 경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39_0040_0010_0010_0010
- https://ncms.nculture.org/house/story/5976
ETIQUETTE
관광 예절
CC BY-NC-ND 2.0 KR | 저작자: 은평한옥역사박물관 | 링크
은평 한옥마을의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고 좋은 시간을 보내다 가시길 바랍니다. 대부분의 상업 지구는 연서로 근방에 조성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주거 지구가 위치합니다. 그렇기에 거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쓰레기 무단투기, 소음 발생, 사유지 불법침해에 각별히 유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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